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 보고 나오니 라쿤 시티가 다시 무서워졌다

얼마 전 극장에서 ‘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을 보고 나오는데, 예전 게임에서 문 하나 열 때마다 괜히 손에 힘이 들어가던 감각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밀라 요보비치 중심의 기존 영화 시리즈가 총격전과 세계 종말 액션 쪽으로 달려갔다면, 이번 작품은 훨씬 작게 시작합니다. 한 사람, 한 번의 배달, 한밤중의 라쿤 시티. 이 단순한 출발점이 의외로 오래 버팁니다.
국내에서는 2026년 9월 17일 개봉한 청소년 관람불가 호러 스릴러이고, 러닝타임은 94분입니다. ‘바바리안’과 ‘웨폰’으로 장르 팬들에게 강하게 각인된 잭 크레거가 연출을 맡았고, 오스틴 에이브람스가 의료 택배 기사 브라이언을 연기합니다. 스포일러는 피하고 말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재미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보다, 브라이언이 얼마나 어설프게 그 밤을 통과하는지에 꽤 많이 걸려 있습니다.
기존 시리즈보다 게임의 초반부에 가깝다
‘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은 유명 캐릭터를 앞세워 팬서비스를 몰아치는 방식이 아닙니다. 크리스, 질, 레온 같은 이름을 기대하고 들어가면 조금 허전할 수 있습니다. 대신 영화는 원작 게임을 처음 켰을 때의 감각, 즉 탄약은 부족하고 길은 막혀 있고 이상한 소리는 가까워지는 그 불안을 영화 문법으로 옮기려 합니다.
브라이언은 라쿤 시티 종합병원으로 긴급 배달을 가는 의료 택배 기사입니다. 눈발이 거세지는 도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 죽은 줄 알았던 존재가 다시 움직이는 순간까지는 익숙한 좀비물의 출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잭 크레거는 이 익숙함을 빠르게 농담과 불쾌함 사이로 밀어 넣습니다. 무섭게 몰아붙이다가도 주인공의 현실적인 당황, 짜증, 자기합리화가 튀어나오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비틀립니다.
공포보다 좋은 건 ‘상황을 통과하는 감각’
솔직히 순수 공포 강도만 놓고 보면, 끝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영화는 아닙니다. 점프 스케어가 있고 고어도 꽤 세지만, 무서움 하나로 밀어붙이는 타입은 아닙니다. 오히려 장점은 관객이 브라이언과 같이 ‘다음 방’으로 넘어가는 느낌에 있습니다. 어두운 공간, 잠긴 문, 이상한 아이템, 점점 커지는 무기, 갑자기 바뀌는 시야. 이 모든 요소가 게임적 리듬을 만듭니다.
특히 눈 덮인 도로와 병원으로 이어지는 공간 설계가 좋습니다. 하얀 눈 위에 남는 핏자국은 단순하지만 강합니다. 라쿤 시티라는 이름이 가진 폐쇄감도 살아납니다. 세상이 이미 망한 뒤의 풍경이라기보다, 방금 망하기 시작한 현장을 지나가는 기분이랄까요. 그래서 제목의 ‘0번째 밤’이라는 말도 꽤 잘 맞습니다. 재앙이 역사책에 적히기 전, 누군가는 그날 밤을 직장 업무처럼 시작했을 테니까요.
오스틴 에이브람스의 평범함이 영화의 무기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 선택은 주인공을 전투형 인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브라이언은 상황 판단이 빠른 영웅도 아니고, 좀비 사태를 대비해온 생존 전문가도 아닙니다. 그냥 일을 맡았고, 거짓말을 조금 했고, 운이 나빴고, 너무 늦게 겁을 먹은 사람입니다. 그 평범함이 영화의 리듬을 살립니다.
오스틴 에이브람스는 겁먹은 얼굴과 허세 섞인 반응을 잘 섞습니다. 그래서 관객은 브라이언을 응원하면서도 가끔은 답답해합니다. 근데 그 답답함이 싫지 않습니다. 실제로 저 상황에 던져지면 대부분 저 정도도 못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잭 체리, 칼리 레이스, 폴 월터 하우저 등 주변 인물들은 많은 분량을 가져가기보다 브라이언이 지나가는 세계의 이상한 표지판처럼 기능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잘 맞고, 이런 사람은 조심
- 게임 ‘바이오하자드’의 퍼즐, 아이템, 제한된 동선 감각을 좋아했다면 꽤 반가운 리부트입니다.
- 기존 영화판의 초능력급 액션보다 서바이벌 호러 쪽을 원했다면 만족도가 높을 수 있습니다.
- ‘바바리안’식 이상한 유머와 신체 변형 공포를 좋아한다면 잭 크레거의 색을 느끼기 좋습니다.
- 반대로 원작 주요 캐릭터의 활약, 거대한 세계관 설명, 묵직한 드라마를 기대하면 아쉬울 수 있습니다.
- 고어와 신체 훼손 묘사가 약한 편은 아니라서 잔혹한 장면에 민감하다면 관람 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OTT로 기다릴 만한가
현재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작으로 안내되고 있고, 국내 OTT 공개 일정은 확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영화는 집에서 틀어놓고 보는 것보다 극장 사운드와 어둠의 도움을 꽤 받는 편입니다. 발소리, 젖은 숨소리, 멀리서 들리는 충돌음이 긴장을 만드는 장면이 많아서 호러 장르를 즐긴다면 극장 쪽이 유리합니다.
개인적으로 ‘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은 완벽한 재출발이라기보다 방향을 제대로 잡은 리부트에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일부 장면은 게임 미션을 차례로 수행하는 느낌이 강해지고, 감정선은 조금 얇습니다. 그래도 이 시리즈가 다시 무서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라쿤 시티는 역시 총을 많이 쏘는 곳보다, 문 하나를 열기 싫어지는 곳일 때 더 매력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