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영화 추천을 부탁받고 취향부터 물었다

영화를 1000편 넘게 보다 보니 좀비영화 추천을 부탁받을 때도 제목부터 말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는 숨 돌릴 틈 없는 추격전을 원하고, 누군가는 무서운 장면 사이에 남는 사람 이야기를 원한다. 같은 좀비영화라도 보고 난 뒤의 기분은 꽤 다르다. 아래 작품들은 결정적인 전개를 밝히지 않고, 어떤 날 어떤 사람에게 잘 맞는지에 따라 골랐다.
처음 본다면 부산행, 익숙한 공포가 좋다면 #살아있다
부산행
좀비영화가 낯설다면 저는 여전히 <부산행>을 먼저 권한다. 딸과 함께 기차에 오른 아버지가 감염 사태에 휘말린다는 출발점이 간단하다. 열차라는 한정된 공간 덕분에 상황을 따라가기도 쉽다. 객실 하나를 건너는 일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 몸으로 느껴지는 영화다.
이 작품의 힘은 달리는 좀비만큼이나 사람들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위기 앞에서 누구를 먼저 들여보내고, 누구를 남겨 둘 것인가. 선택이 쌓일수록 액션의 속도와 감정의 무게가 함께 커진다. 가족이나 친구와 본 뒤 인물의 행동을 두고 이야기 나누기에도 좋다. 다만 가족 관계에 감정이 깊이 실리는 편이라, 가볍고 통쾌한 오락을 기대한 날에는 후반부가 무겁게 남을 수 있다.
#살아있다
반대로 <#살아있다>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답답함에서 시작한다. 원인 모를 바이러스가 퍼지고, 주인공은 아파트에 홀로 남는다. 창밖에는 위험이 보이는데 통신과 물자는 점점 부족해진다. 거대한 도시가 무대여도 관객이 체감하는 세계는 방과 복도, 맞은편 건물 정도로 좁다.
<부산행>의 긴장감이 사람들 틈에서 생긴다면, 이쪽은 혼자 버티는 시간에서 생긴다. 집이라는 익숙한 공간이 낯설어지는 공포를 좋아한다면 잘 맞는다. 대신 인물 간의 촘촘한 관계나 큰 규모의 액션을 기대하면 단순하게 느껴질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감염자의 위협과 갑작스러운 공격 장면이 있어 공포에 약한 사람과 함께 볼 때는 참고할 만하다.
숨 막히는 분위기를 원하면 28일 후
<28일 후>는 감염 사태가 지나간 뒤 텅 빈 런던에서 출발한다. 사람이 있어야 할 거리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하다. 여기에 감염자들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잠깐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추격전이 이어진다. 좀비영화에서 속도감과 황폐한 도시의 분위기를 함께 찾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추격 장면만이 아니다. 생존자들이 안전한 곳을 찾아갈수록 무엇을 믿을 수 있는지가 더 불분명해진다. 감염의 공포에서 출발해 사람에 대한 불안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선명하다. 밝고 시원한 액션을 기대했다면 꽤 거칠게 느껴질 수 있고, 강한 폭력 묘사도 있다. 장르의 어두운 면까지 보고 싶은 날 고르는 편이 맞다.
무서운 장면 사이에 웃고 싶다면 새벽의 황당한 저주
친구가 좀비영화는 궁금하지만 두 시간 내내 긴장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면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꺼낸다. 숀은 평소의 무기력한 일상을 제대로 바꾸지도 못한 채 좀비 사태를 맞는다. 세상이 뒤집혔는데도 일상의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웃음을 만든다.
코미디라고 해서 좀비가 장식으로만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다. 친구와 가족을 데리고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는 위험이 있고, 웃기던 인물이 뜻밖에 마음을 쓰이게 하는 순간도 있다. 빠른 장면 전환과 작은 시각적 농담이 많아 두 번째 볼 때 새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다만 영국식 농담의 박자가 취향에 맞지 않으면 초반이 심심할 수 있다. 피가 보이는 장면도 있으니 공포를 전혀 못 보는 사람을 위한 선택은 아니다.
다 보고 오래 남는 이야기는 카고
좀비보다 사람을 더 오래 바라보는 영화를 원한다면 <카고>가 있다. 감염병이 퍼진 호주 내륙에서 한 아버지가 어린 딸을 돌봐 줄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난다. 다른 작품들이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집중할 때, 이 영화는 자신이 끝까지 곁에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붙든다. 황량한 풍경과 느린 걸음이 그 마음을 더 크게 만든다.
<부산행>도 부모와 아이의 이야기지만 감정에 이르는 방식은 다르다. <부산행>이 밀려드는 위기 속에서 선택을 재촉한다면 <카고>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게 한다. 숨 가쁜 전투와 많은 감염자를 기대하면 조용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린아이의 안전이 걸린 이야기라 마음이 힘든 날에도 피하는 편이 좋겠다. 대신 잔잔한 여운을 좋아한다면 다섯 편 중 가장 오래 떠오를 수 있다.
지금 한 편만 고른다면 첫 좀비영화에는 <부산행>, 밀폐된 공간의 불안에는 <#살아있다>, 거친 생존극에는 <28일 후>가 맞겠다. 웃음이 필요한 밤에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 감정이 남는 영화를 보고 싶은 밤에는 <카고>를 고르겠다. OTT 편성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바뀌므로 재생 전 이용 중인 서비스에서 작품명을 확인하는 게 정확하다. 결국 좀비의 수보다 그날 내가 견디고 싶은 감정이 선택을 더 잘 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