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영화 촬영방법을 따라 보니 빛보다 거리가 먼저 보였다

얼마 전 <중경삼림>을 다시 보다가 사람들로 꽉 찬 거리에서 유독 한 인물만 또렷하게 남는 장면을 멈춰 봤다. 처음에는 홍콩의 밤빛이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화양연화>까지 이어서 보니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였다. 왕가위 영화의 촬영방법은 특정 색감 하나로 묶기 어렵다. 흔들리는 거리와 고요한 복도는 전혀 달라 보이지만, 둘 다 인물이 그 순간을 어떻게 견디는지 보여준다. 아래 내용은 주요 반전을 밝히지 않는다.
사람은 선명한데 거리는 흘러가는 이유
<중경삼림>의 거리 장면에는 손으로 든 카메라와 불규칙하게 끊기는 움직임이 자주 나온다. 왕가위는 뉴욕 영상박물관 대화에서 현장 빛을 활용해 촬영하고 스텝 프린팅을 썼다고 설명했다. 스텝 프린팅은 촬영한 프레임을 반복해 출력하는 방식이다. 낮은 프레임 속도와 긴 노출이 더해지면 움직이는 사람은 번지고, 같은 순간이 몇 번씩 붙잡힌 듯 보인다. 빠르게 재생한 영상이나 일반적인 슬로모션과는 다른 감각이다.
이 효과가 인상적인 건 화면이 그저 화려해서가 아니다. 군중은 바쁘게 밀려가는데 주인공의 시간만 어긋난 것처럼 느껴진다. 직접 비슷한 장면을 찍는다면 필터부터 고르기보다 움직임이 서로 다른 두 대상을 한 화면에 놓는 편이 낫다. 멈춘 사람 뒤로 행인이 지나가게 하고, 셔터 속도와 프레임 반복을 조금씩 바꿔 보면 어느 순간부터 배경이 인물의 감정처럼 보이는지 알 수 있다. 밝은 낮보다 간판이나 실내등처럼 빛의 방향이 분명한 장소에서 변화가 잘 드러난다.
가까이 붙을수록 외로워지는 화면
<타락천사>에서는 광각렌즈를 인물 가까이에 들이댄 장면이 눈에 띈다. 얼굴은 크게 다가오고, 그 뒤의 공간은 길게 밀려난다. 왕가위는 BOMB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인물을 매우 넓은 화각으로 찍었다고 말했다. 좁은 장소에서 카메라를 놓을 자리가 부족했던 경험도 그런 선택에 영향을 줬다. 그래서 화면은 관객을 인물 곁에 세워 두면서도, 인물이 주변 세계와 편하게 어울린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여기서 따라 해볼 부분은 렌즈의 숫자보다 거리다. 광각으로 멀리서 찍으면 풍경이 넓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얼굴과 배경 사이의 간격이 과장된다. 배우가 카메라를 의식할 만큼 가까운 자리에서 찍고, 배경의 선이 어디로 뻗는지 확인하면 같은 렌즈로도 전혀 다른 장면이 나온다. 다만 모든 대화에 이 구도를 쓰면 감정의 높낮이가 사라진다. <타락천사>의 거친 근접 화면이 유효한 건 밤거리, 이동, 불안정한 관계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복도와 문틀이 대신 말하는 마음
<화양연화>는 앞의 두 작품과 호흡이 다르다. 인물을 정면에서 넉넉하게 보여주기보다 문틀 너머나 좁은 복도 끝에 두고 바라본다. 화면 한쪽을 벽이 차지할 때도 있다. 카메라가 조금 늦게 따라가거나 한 자리에 머물면, 관객은 인물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게 된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복도와 계단도 같은 감정을 조금씩 다르게 쌓는다.
이 영화의 촬영을 크리스토퍼 도일 한 사람의 솜씨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왕가위는 BOMB 인터뷰에서 촬영 도중 도일이 다른 작업으로 자리를 비웠고, 이후 마크 리 핑빈과 작업했다고 밝혔다. 윌리엄 장의 미술과 의상 역시 화면의 색과 공간을 만드는 데 중요한 몫을 한다. 붉은 벽이나 무늬 있는 옷만 흉내 내면 분위기는 남아도 인물 사이의 망설임은 빠지기 쉽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는지부터 정해야 화면이 감정을 갖는다.
왕가위의 색보다 먼저 따라갈 것
왕가위는 촬영 전에 모든 장면을 세세하게 확정하기보다 현장에서 리듬을 찾아가는 편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했다. 음악을 들으며 장면의 속도를 생각한다는 설명도 했다. 그래서 그의 화면을 찍는 방법만 떼어 놓고 보면 놓치는 게 많다. 같은 걸음을 여러 번 보여줄지, 음악이 시작된 뒤에도 카메라를 멈춰 둘지, 인물이 떠난 빈자리를 얼마나 더 볼지가 촬영만큼 중요하다.
입문작을 고른다면 움직임이 빠른 도시의 감각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중경삼림>, 과장된 원근과 밤의 기운이 끌리는 사람에게는 <타락천사>가 잘 맞는다. 말보다 침묵과 간격을 오래 바라보는 편이라면 <화양연화>가 더 깊게 남을 수 있다. 저는 세 작품을 번갈아 볼 때마다 왕가위다운 화면이란 색을 입힌 화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아직 그럴 수 없는 시간을 보여주는 화면이라고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