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좀비 드라마를 다시 골라보니 네 편이 남았다

영화와 드라마를 1000편 넘게 보다 보니, 좀비물을 추천할 때 가장 먼저 묻게 되는 건 무서운 장면을 얼마나 잘 보는지가 아니었다. 긴 생존기를 따라가고 싶은지, 사람 사이의 감정이 궁금한지, 아니면 가볍게 웃고 싶은지가 작품 선택을 더 크게 갈랐다. 미국 좀비 드라마도 그 기준으로 고르면 훨씬 고르기 쉽다. 아래 네 편은 이야기의 출발점과 분위기까지만 소개한다. 주요 인물의 운명이나 반전은 언급하지 않는다.
오래 함께할 생존 이야기가 좋다면 워킹 데드
워킹 데드는 장르의 기준점처럼 불리는 데 이유가 있다. 경찰관 릭이 깨어난 뒤 이미 무너진 세상에 들어서는 첫 장면부터, 이 드라마는 좀비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선택에 시선을 둔다. 안전한 곳을 찾고, 낯선 사람과 손을 잡고, 그 관계가 흔들리는 과정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AMC가 공개한 원작 드라마 분량은 11개 시즌, 177화다. 마음에 드는 인물들과 오래 지낼 수 있다는 뜻인 동시에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꽤 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첫 시즌은 규모가 크지 않아 오히려 좋다. 낯선 세계에 들어온 릭의 시선으로 위험을 하나씩 익히게 되고, 무리가 생기면서 드라마의 질문도 선명해진다. 다만 시즌이 쌓일수록 공동체 간 갈등과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매회 좀비와의 추격전을 기대하면 중간에 느리다고 느낄 수 있다. 사람을 믿는 일이 언제 위험해지는지 지켜보는 쪽이 재미있다면 긴 분량이 부담만으로 남지는 않는다.
감정이 남는 짧은 시작을 원한다면 라스트 오브 어스
라스트 오브 어스는 조엘이 소녀 엘리와 함께 미국을 가로지르는 이야기다. 첫 시즌은 9화라 워킹 데드보다 진입 부담이 작다.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장소를 만나지만, 사건을 많이 보여주는 것보다 그 만남이 두 사람에게 무엇을 남기는지에 관심이 크다. 폐허의 풍경이 인상적이어도 기억에 오래 남는 건 조용한 대화와 망설임이다.
엄밀히 말해 이 작품의 감염자는 죽었다가 되살아난 전통적인 좀비가 아니다. 균류 감염이라는 설정을 쓰므로 좀비의 기원이나 규칙을 중시한다면 알고 시작하는 편이 좋다. 그래도 감염자가 돌아다니는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는지를 보고 싶다면 충분히 이 목록에 놓을 만하다. HBO가 공개한 두 번째 시즌은 7화이며, 첫 시즌의 관계가 마음에 남았다면 다음 이야기도 이어 볼 수 있다. 다만 잔혹한 장면보다 상실을 다루는 장면이 더 버겁게 다가올 수 있다.
속도와 엉뚱함을 즐긴다면 Z 네이션
앞의 두 작품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면 Z 네이션으로 방향을 틀어도 좋다. 생존자들이 치료의 가능성을 가진 인물을 데리고 미국을 횡단한다는 목표가 분명하다. 길 위에서 맞닥뜨리는 사건은 빠르게 바뀌고, 기괴한 아이디어와 농담도 거리낌 없이 나온다. SYFY에서 방영된 5개 시즌짜리 작품으로, 황폐한 세계를 진지하게만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꽤 자유롭다.
바로 그 과장된 맛이 취향을 가른다. 설정의 빈틈이 눈에 들어오면 몰입하기 어렵고, 다음에는 무슨 황당한 일이 벌어질지 기대한다면 연달아 보게 된다. 워킹 데드의 묵직한 인간관계에 지쳤지만 좀비 아포칼립스 자체는 더 보고 싶은 사람에게 특히 잘 맞는다. 가벼운 분위기라고 해서 유혈 장면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니, 고어 표현에 민감하다면 주의가 필요하다.
좀비물도 웃으며 보고 싶다면 산타 클라리타 다이어트
산타 클라리타 다이어트는 교외에서 부동산 일을 하며 살던 부부의 일상이 아내 실라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뒤집히는 이야기다. 세계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대신 가족의 식탁과 이웃 관계가 먼저 흔들린다. 남편 조엘이 터무니없는 상황을 어떻게든 일상의 문제처럼 처리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이 드라마 특유의 웃음이 나온다. 넷플릭스가 소개하는 분량은 3개 시즌이다.
밝은 화면과 빠른 대사 때문에 편하게 볼 코미디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식욕을 둘러싼 묘사는 제법 노골적이다. 끔찍한 장면과 건조한 농담이 한꺼번에 나오는 취향이라면 재미있지만, 식사하면서 틀 작품을 찾는 사람에게는 권하기 어렵다. 또 마지막 시즌 이후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아, 모든 갈등이 깔끔하게 닫히는 작품을 선호한다면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한 편만 고른다면 기준은 간단하다. 긴 호흡으로 인물과 함께 살고 싶으면 워킹 데드, 짧게 시작해 진한 감정을 만나고 싶으면 라스트 오브 어스가 좋다. 속도감에는 Z 네이션, 엉뚱한 가족 코미디에는 산타 클라리타 다이어트가 맞는다. OTT 제공 여부는 국가와 시기에 따라 달라지므로 재생 전에 사용하는 서비스에서 작품명을 확인하는 편이 정확하다. 내게 좋은 좀비 드라마는 가장 많은 좀비가 나오는 작품보다, 보고 난 뒤 그 세계의 사람들을 조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