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추천 영화 다섯 편을 다시 골라봤더니

얼마 전 친구가 사극 추천 영화를 물었다. 왕이 나오는 영화면 다 비슷하지 않느냐고도 했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같은 궁궐을 배경으로 해도 어떤 영화는 권력 싸움의 재미를 주고, 어떤 영화는 가족 사이의 상처를 오래 남긴다. 내가 다시 보고 싶은 다섯 편을 고를 때도 작품의 유명세보다 ‘지금 어떤 기분으로 볼 수 있나’를 먼저 생각했다. 아래 작품 설명에는 중요한 반전이나 마지막 장면을 넣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광해, 왕이 된 남자
사극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에게 한 편만 권한다면 나는 대개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를 고른다. 광해군을 대신해 왕 노릇을 하게 된 하선의 이야기라 설정을 이해하기 쉽다. 처음에는 낯선 궁중 생활에서 나오는 웃음이 길을 열고, 시간이 갈수록 ‘왕이라면 누구를 위해 결정해야 하나’라는 질문이 자리를 차지한다. 이병헌이 광해와 하선을 모두 연기하는데, 두 인물의 말투와 몸가짐이 달라 같은 얼굴을 보는 재미가 있다.
장점은 인물에게 마음을 붙이기 쉽다는 것. 정치 용어를 다 알아야 따라갈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반대로 치밀한 사료 재현을 기대한다면 왕의 대역이라는 중심 설정부터 영화적 상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거운 사극은 부담스럽지만 웃고 난 뒤에도 생각할 거리가 남았으면 하는 날에 잘 맞는다.
권력 싸움이 보고 싶다면 관상과 남한산성
관상
<관상>(2013)은 사람의 얼굴을 읽는 내경을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건 한가운데 놓는다. 초반에는 내경과 팽헌이 주고받는 말이 경쾌하다. 그러다 수양대군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미 역사책에 적힌 큰 흐름을 관객은 알고 있는데, 내경은 눈앞의 선택으로 그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볼 때 관상이라는 능력보다, 아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리를 보게 된다.
송강호의 내경과 이정재의 수양대군이 마주하는 장면을 좋아한다면 만족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초반의 유쾌함이 끝까지 이어지는 작품은 아니다. 인물의 선택이 무거워지는 뒤쪽까지 볼 마음이 있을 때 고르는 편이 좋다. 실제 사건에 가상의 관상가를 더한 이야기이니, 인물 관계를 그대로 역사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남한산성
<남한산성>(2017)은 훨씬 차갑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힌 조정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나라를 지키는 길을 두고 맞선다. 둘의 주장은 단순히 용기와 비겁함으로 나뉘지 않는다. 무엇을 지키려는지, 그 선택의 대가를 누가 치르는지까지 듣다 보면 어느 한쪽에 쉽게 기대기 어렵다. 성 밖과 안의 추위도 말뿐인 논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킨다.
긴 대화와 팽팽한 침묵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권한다. 전투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영화를 찾는다면 140분의 호흡이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관상>이 한 개인이 권력의 흐름에 휩쓸리는 이야기라면, <남한산성>은 이미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서로 다른 책임을 붙드는 이야기다. 두 편을 나란히 보면 사극의 긴장감이 꼭 칼을 뽑는 순간에만 생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물의 감정이 오래 남는다면 왕의 남자와 사도
왕의 남자
<왕의 남자>(2005)는 연산군 앞에서 공연하게 된 광대 장생과 공길을 따라간다. 궁궐의 화려함보다 눈길을 끄는 건 무대 위의 아슬아슬한 자유다. 광대들은 웃음을 만들지만, 그 웃음이 권력자의 마음에 어떻게 닿을지는 통제할 수 없다. 같은 공연 장면도 처음에는 통쾌하다가 어느 순간 불안하게 보인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찾는 이유는 바로 그 감정의 변화다.
왕과 신하의 계책보다 관계의 미묘한 긴장, 공연의 몸짓과 표정에 끌리는 사람에게 맞는다. 다만 연산군을 둘러싼 폭력적인 장면과 어두운 정서는 염두에 두는 게 좋다. 가벼운 궁중 코미디를 기대하고 틀면 예상보다 쓰라릴 수 있다.
사도
<사도>(2015)는 영조와 사도세자를 왕과 후계자이면서 아버지와 아들로 함께 바라본다. 영화가 붙드는 것은 누구 말이 더 옳은지를 가리는 순간보다, 기대와 두려움이 쌓여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과정이다. 송강호와 유아인의 연기를 따라가다 보면 궁궐의 예법이 두 사람 사이에서 얼마나 무거운 말이 되는지 느껴진다.
가족 관계를 중심에 둔 비극을 감당할 수 있는 날에 권한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널리 알려진 역사인 만큼 사건 자체를 피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여기서부터는 영화가 그 사건에 이르는 과정과 감정을 보여준다는 정도만 알고 보는 편이 좋겠다. 다섯 편 중 보고 난 뒤 가장 쉽게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지 못했던 영화도 내게는 <사도>였다.
오늘 한 편을 고른다면
가볍게 시작하고 싶다면 <광해, 왕이 된 남자>, 속도감 있는 궁중 권력극이라면 <관상>이 좋다. 대사가 남는 영화를 원하면 <남한산성>, 무대와 인물의 관계가 궁금하면 <왕의 남자>, 묵직한 가족 비극을 볼 마음이 있다면 <사도>를 고르겠다. OTT 제공 여부는 시기에 따라 바뀌므로 재생 전 이용 중인 서비스에서 작품명을 확인하는 편이 정확하다. 내게 좋은 사극은 옛날 옷을 잘 보여주는 영화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시대의 인물이 내린 선택을 보고 나서, 지금의 나라면 어땠을지 한동안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