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영화 추천을 부탁받고 다시 고른 다섯 편

얼마 전 서부 영화를 한 편 골라 달라는 말을 듣고 한참 망설였다. 같은 황야를 배경으로 해도 어떤 영화는 총잡이의 대결을 기다리게 하고, 어떤 영화는 그가 총을 든 뒤의 삶을 오래 바라본다. 1000편 넘게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서부극은 명작 순위보다 지금 보고 싶은 감정에 맞춰 고를 때 훨씬 잘 맞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문하기 좋은 작품부터 고전의 느린 호흡, 현대적인 서부극까지 다섯 편을 골랐다. 아래에는 출발점이 되는 설정만 적었다. 반전과 마지막 장면은 이야기하지 않지만, 폭력 묘사에 민감하다면 각 작품의 안내를 먼저 읽는 편이 좋다.
처음 보는 서부극이라면 더 브레이브
코언 형제의 2010년 영화 <더 브레이브>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으려는 열네 살 매티가 술을 좋아하는 보안관 루스터 코그번과 길을 떠나는 이야기다. 화면은 먼지투성이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매티의 단단한 말투와 고집이다. 서부극의 규칙을 몰라도 이 아이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져서 따라가게 된다.
빠른 총격전만 기대하면 의외로 대화가 길게 느껴질 수 있다. 반대로 성격이 다른 인물들이 부딪히며 쌓이는 긴장을 좋아한다면 좋은 첫 편이다. 복수극의 출발점이라 총격과 위협 장면은 있다. 제프 브리지스의 거친 루스터와 헤일리 스타인펠드의 또렷한 매티가 서로를 밀고 당기는 재미가 크다.
긴장감이 먼저 필요하다면 하이 눈
1952년작 <하이 눈>의 상황은 간단하다. 은퇴를 앞둔 보안관 윌 케인이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무법자가 정오 열차를 타고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에게 남은 시간 동안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하나씩 드러난다. 총을 쏘기 전부터 긴장되는 영화다.
오래된 흑백 영화가 부담스럽다면 이 작품부터 권하고 싶다.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시계와 기차가 초조함을 또렷하게 만든다. 화려한 액션보다 위기 앞에서 누가 곁에 남는지를 보고 싶은 사람에게 맞는다. 미국영화연구소가 꼽은 대표적인 서부극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흑백 화면의 속도가 익숙해지는 데에는 잠깐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뒤로는 마을의 침묵이 꽤 크게 들린다.
서부극의 화면과 음악에 빠지고 싶다면 석양의 무법자
세르조 레오네의 1966년작 <석양의 무법자>는 세 사람이 숨겨진 금을 좇는 이야기다. 넓은 풍경을 보여주다가 얼굴을 바짝 당기고, 침묵을 길게 끌다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으로 장면의 공기를 바꾼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서부극의 표정이 여기 있다.
다만 여유 있게 앉을 수 있는 날 고르는 게 좋다. 영화가 인물의 눈빛과 거리,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기 때문이다. 빠르게 사건이 이어지는 편집을 선호한다면 길게 느껴질 수 있다. 미국 남북전쟁을 지나는 여정에는 포로와 전장의 폭력도 나온다. 이 영화의 매력은 누가 먼저 쏘는지보다, 쏘기 직전까지 세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어떻게 팽팽해지는지에 있다.
총잡이의 전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
1992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과거에 사람을 죽였던 윌리엄 머니를 연기하고 감독도 맡았다. 지금의 그는 아이들을 돌보는 농부다. 돈이 필요한 그에게 현상금이 걸린 일이 들어오면서, 영화는 오래 묻어둔 폭력이 다시 삶에 끼어드는 과정을 따라간다.
앞선 세 편에서 총잡이의 결단을 즐겼다면 이 영화는 그 결단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누가 더 빨리 쏘는가보다 누가 다치고, 그 일을 누가 이야기로 바꾸는가에 눈이 간다. 성인에게 권할 만한 작품이며 여성 대상 폭력과 거친 살해 묘사가 이야기의 출발점에 있다. 통쾌한 복수를 기대하는 날보다는 서부극을 보고 난 뒤 오래 생각하고 싶은 날에 잘 맞는다.
말을 탄 지금의 사람을 보고 싶다면 더 라이더
클로이 자오의 <더 라이더>는 서부극 하면 떠오르는 오래전 개척 시대를 떠난다. 로데오 사고 뒤 다시는 예전처럼 탈 수 없을지 모르는 젊은 카우보이 브래디가 오늘의 미국 서부에서 살아간다. 브래디 잔드로와 가족, 친구들이 자신과 가까운 인물을 연기해 말과 사람 사이의 시간이 유난히 생생하다.
이 작품에는 거창한 악당도, 대결을 기다리는 총잡이도 없다. 대신 평생 잘해 온 일을 계속할 수 없을 때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묻는다. 로데오와 부상 이야기가 마음에 걸릴 수 있지만, 말과 함께 있는 장면의 온기를 좋아한다면 다섯 편 중 가장 오래 남을 수도 있다. 느리고 조용한 영화가 당기는 날에 권한다.
OTT에서 찾을 때는 같은 작품이라도 연도와 감독을 함께 확인하면 편하다. 특히 <더 브레이브>는 2010년 코언 형제 작품을 기준으로 골랐다. 서비스별 제공 여부는 바뀌므로 시청 직전에 검색하는 게 정확하다. 오늘 당장 한 편만 고른다면, 이야기의 추진력이 필요할 때는 <더 브레이브>, 서부극 특유의 기다림을 즐기고 싶을 때는 <하이 눈>을 먼저 틀겠다. 마음에 드는 쪽을 찾으면 나머지 영화의 느린 장면까지 조금씩 달리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