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영화 추천을 부탁받고 다시 고른 일곱 편

얼마 전 친구가 재난 영화 하나만 골라 달라고 했는데, 막상 제목부터 말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재난 영화라도 누군가는 숨 돌릴 틈 없는 탈출을 원하고, 누군가는 위기 앞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래 보다 보니 별점보다 그날의 기분을 먼저 묻게 된다. 아래 일곱 편은 그런 기준으로 골랐다. 사건의 출발점만 이야기하고, 주요 반전과 결말은 건드리지 않겠다.
속도감이 필요하다면 엑시트와 부산행
엑시트
도심에 유독가스가 퍼지고, 용남과 의주는 건물 옥상을 오가며 탈출구를 찾는다. 설정만 들으면 무거운 영화 같지만, <엑시트>의 장점은 몸으로 풀어내는 경쾌함이다. 두 사람이 대학 시절 익힌 클라이밍 기술을 쓰는 순간마다 ‘저 선택은 이해된다’는 감각이 따라온다. 재난 영화가 보고 싶은데 잔혹한 장면은 부담스럽다면 가장 먼저 권할 만하다. 가족과 함께 보기에도 비교적 편한 쪽이다.
부산행
<부산행>은 열차라는 좁은 공간을 끝까지 활용한다. 객차 하나를 넘어가는 일이 곧 한 편의 작은 탈출극이 되고, 움직임이 멈추면 인물 사이의 갈등이 또 다른 긴장을 만든다. 좀비 영화에 익숙하지 않아도 흐름을 따라가기 쉽다. 다만 감염자의 빠른 움직임과 위협적인 장면이 많다. 가벼운 오락을 기대했다면 <엑시트>가, 액션 끝에 감정의 여운까지 원한다면 <부산행>이 맞겠다.
재난 뒤에 남는 사람을 보고 싶다면
터널
무너진 터널에 한 사람이 갇힌다. <터널>은 이 단순한 상황을 크게 부풀리지 않는다. 안에서는 작은 물건 하나와 짧은 통화가 절실해지고, 밖에서는 구조를 둘러싼 판단이 복잡해진다. 거대한 도시가 무너지는 장면보다 ‘한 사람을 어디까지 기다릴 수 있나’라는 질문이 오래 남는 영화다. 밀폐된 공간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답답할 수 있다. 반대로 재난 상황의 사회적 반응까지 보고 싶다면 꽤 정확한 선택이다.
더 임파서블
2004년 인도양 쓰나미를 겪은 가족의 실화에서 출발한다. 파도가 덮치는 장면도 강렬하지만, 이 영화에서 더 오래 남는 건 흩어진 가족이 서로의 생사를 모른 채 버티는 시간이다. 그래서 재난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보기 어렵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생존극과 가족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추천한다. 부상 묘사와 물에 휩쓸리는 장면은 꽤 직접적이어서, 그날 컨디션이 가라앉아 있다면 다른 작품을 먼저 고르는 편이 낫다.
조용히 불안해지는 영화가 끌린다면 컨테이젼
<컨테이젼>에는 건물이 쓰러지거나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지 않는다. 감염병이 퍼지는 동안 의료진, 행정 담당자,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인다. 영화가 긴장을 만드는 방식도 차분하다. 누군가 손으로 만진 물건, 확인되지 않은 말, 사람들의 반응이 차곡차곡 쌓인다. <부산행>처럼 질주하는 전개를 기대하면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대신 재난이 일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일곱 편 중 가장 서늘하게 다가올 것이다. 감염병 소재가 개인적으로 힘들게 느껴진다면 피하는 게 좋다.
큰 화면 같은 쾌감을 원한다면 그린랜드와 투모로우
그린랜드
혜성 파편의 충돌이 예고되자 한 가족이 안전한 곳을 향해 이동한다. <그린랜드>는 지구 규모의 위협을 다루면서도 시선을 가족의 이동 경로에 붙여 둔다. 그래서 ‘도시는 얼마나 크게 부서질까’보다 ‘지금 이 가족이 함께 갈 수 있을까’가 더 궁금해진다. 블록버스터의 긴장감은 원하지만 인물에게도 마음을 붙이고 싶을 때 잘 맞는다. 인파 속 혼란과 가족이 떨어지는 상황이 불편하다면 감안하고 고르면 좋겠다.
투모로우
<투모로우>는 급격한 기후 변화가 몰고 온 재난을 거대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얼어붙은 도시와 몰아치는 폭풍을 보는 맛이 분명하다. 과학적 현실성을 따지며 보기보다, 재난 블록버스터 특유의 규모와 빠른 전개를 즐길 때 만족도가 높다. <그린랜드>가 가족을 따라가는 긴박함에 가깝다면, <투모로우>는 압도적인 풍경을 보는 재미에 가깝다.
딱 한 편만 고른다면 그날 감당할 수 있는 긴장감부터 생각한다. 웃을 틈이 필요하면 <엑시트>, 마음을 오래 붙잡는 이야기를 원하면 <터널>, 재난 자체의 규모를 즐기고 싶으면 <투모로우>다. 같은 장르 안에서도 보고 난 뒤의 온도는 이렇게 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