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영화 추천을 부탁받고 다시 고른 네 편

영화를 1000편 넘게 보다 보니 ‘성장 영화 하나 추천해 달라’는 말이 오히려 어렵게 들립니다. 누군가는 답답한 십 대 시절을 떠올리고 싶고, 누군가는 지금의 삶이 괜찮은지 묻고 싶으니까요. 그래서 인물이 몇 살인지보다 어떤 마음에 오래 남는지를 기준으로 네 편을 골랐습니다. 아래 내용은 이야기의 출발점만 다룹니다. 중요한 전개와 결말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엄마와 말만 하면 부딪힌다면 레이디 버드
크리스틴은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는 고등학생입니다. 고향을 떠나 더 큰 도시의 대학에 가고 싶어 하지만, 엄마는 집안 형편부터 이야기합니다. A24의 작품 소개도 이 영화의 중심에 졸업반 딸과 엄마의 다정하면서 거친 관계를 놓습니다. 누구 하나를 악역으로 만들지 않는 점이 좋습니다. 엄마의 말은 현실적이지만 아프고, 딸의 반발은 철없어 보여도 이해가 됩니다.
이 영화가 맞는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집에서는 자꾸 다른 사람이 되는 사람입니다. 친구 관계와 첫 연애의 민망함도 꽤 정확하게 잡아냅니다. 대사는 경쾌하고 장면 전환도 빠른 편이라 무거운 가족극을 각오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부모와의 갈등이 지금 한창인 사람에게는 웃긴 장면 뒤의 한마디가 예상보다 깊이 박힐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가 옳았나’보다 ‘왜 서로 같은 말을 다르게 들었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조용히 혼자인 시간이 길었다면 벌새
1994년 서울, 중학생 은희는 바쁜 가족 사이에서 자기 마음을 둘 곳을 찾습니다. 친구와 어울리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지만, 그때마다 외로움이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서울독립영화제가 소개한 줄거리에서도 은희를 이해해 주는 어른의 등장이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영화는 그 만남을 쉬운 해답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잠깐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은희의 하루에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차분히 지켜봅니다.
큰 사건이 잇달아 터지는 영화를 기대한다면 느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대신 작은 표정, 집 안의 공기, 어른이 건넨 말 한마디를 오래 바라볼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잘 맞습니다. 십 대의 외로움을 지나온 어른이라면 당시에는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밝고 가벼운 위로를 찾는 밤보다는, 조금 무거워도 진실한 영화를 보고 싶은 날 권하고 싶습니다.
실패한 기분을 웃으며 덜어내고 싶다면 미스 리틀 선샤인
어린 올리브가 미인 대회에 참가하게 되자 가족은 낡은 승합차에 함께 올라 먼 길을 갑니다. 서치라이트 픽처스가 소개하는 가족 구성원만 봐도 조용한 여행은 어려워 보입니다. 성공에 집착하는 아빠, 말을 멈춘 오빠, 각자 감당할 일이 있는 어른들이 좁은 차 안에 모입니다. 영화의 웃음은 이 가족이 멋지게 변해서 나오지 않습니다. 서로의 부족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데서 나옵니다.
성공과 실패를 너무 또렷이 나누는 말에 지쳤다면 이 작품이 잘 맞습니다. 올리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성장하는 사람이 꼭 어린아이만은 아니라는 것도 보입니다. 그렇다고 내내 밝은 가족 코미디는 아닙니다. 우울과 좌절을 겪는 인물들이 있어 가볍게 웃다가도 마음이 묵직해집니다. 그래도 보고 나면 ‘잘해야만 함께 있을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구나’ 하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입니다.
어른이 된 뒤의 성장이 필요하다면 소울
픽사가 소개하는 조 가드너는 재즈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중학교 음악 교사입니다. 오래 기다린 연주 기회가 찾아왔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을 겪으며, 자신이 바라보던 삶을 다른 자리에서 보게 됩니다. 설정은 환상적이지만 질문은 아주 현실적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이뤄야 비로소 제대로 사는 걸까. 꿈을 오래 붙잡고 살아온 사람일수록 조의 조급함이 낯설지 않을 겁니다.
애니메이션이라 접근하기 쉽고 음악과 색감도 풍부합니다. 다만 삶의 의미와 죽음을 이야기하므로 어린아이와 편하게 웃으며 볼 작품을 찾는 경우라면 분위기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에게 특히 이 영화를 권합니다. 네 편 중 가장 직접적으로 어른의 성장을 다루면서도, 당장 꿈을 접거나 인생을 바꾸라고 재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족과의 대화가 어렵다면 레이디 버드, 오래된 외로움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싶다면 벌새가 먼저 떠오릅니다. 웃음이 필요한 날에는 미스 리틀 선샤인, 목표를 이룬 뒤의 삶까지 생각하게 되는 날에는 소울이 좋겠습니다. 성장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인물이 마침내 완성돼서가 아닐 겁니다. 서툰 채로도 조금 다른 내일을 맞을 수 있다는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