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코미디 영화 추천을 부탁받아 다시 고른 다섯 편

얼마 전 친구가 로맨스 코미디 영화 추천을 부탁하면서 조건을 하나 붙였다. “너무 유치하지만 않으면 좋겠어.” 영화를 많이 볼수록 이런 부탁이 오히려 어렵다. 같은 로맨스 코미디라도 어떤 작품은 대사가 좋고, 어떤 작품은 상황 자체가 웃기며, 어떤 작품은 사랑보다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별점 순서 대신 지금 어떤 기분인지에 따라 다섯 편을 골랐다. 아래에는 각 영화의 기본 설정만 적었다. 관계가 바뀌는 계기나 마지막 선택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건드리지 않았다.
대화가 재미있는 영화를 찾는다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해리와 샐리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지만 남녀 사이에 우정이 가능한지를 두고 생각이 다르다. 이 단순한 질문이 영화 전체의 대화를 끌고 간다. 1989년 영화라 휴대전화도 메신저도 없는 뉴욕을 보게 되는데, 이상하게 두 사람이 서로의 말을 받아치는 속도는 지금 봐도 생생하다. 큰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작품은 아니다. 대신 시간이 흐르며 농담의 뜻과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보는 재미가 있다.
밀고 당기는 연애보다 친구와 오래 이야기하다 마음이 달라지는 과정이 좋다면 잘 맞는다. 반대로 시작부터 빠른 전개와 강한 사건을 원한다면 초반은 느긋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로맨스 코미디에서 중요한 게 기발한 고백보다 두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말하는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복잡한 생각 없이 웃고 싶다면
프로포즈
출판사 상사 마거릿은 체류 문제를 해결하려고 부하 직원 앤드루와 약혼한 사이라고 선언한다. 서로 탐탁지 않아 하는 두 사람이 약혼한 척해야 하니, 웃음이 어디서 나올지는 금방 짐작된다. 영화는 그 예상을 숨기기보다 산드라 불럭과 라이언 레이놀즈의 티격태격하는 호흡에 힘을 준다. 특히 일터에서 굳어 있던 두 사람의 관계가 가족 앞에서는 다르게 보이는 순간들이 재미있다.
가짜 연애라는 익숙한 설정을 좋아하고, 가볍게 웃을 영화가 필요한 날에 권한다. 다만 직장 상사와 직원 사이의 권력 차이가 이야기의 출발점이라 그 설정이 불편할 수 있다. 인물의 행동을 현실적인 기준으로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즐거움이 줄어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30일
한국 영화 중에서는 강하늘과 정소민이 출연한 30일을 고르겠다. 이혼까지 30일을 남긴 부부가 사고로 함께 기억을 잃는다는 출발점부터 요란하다. 두 사람이 왜 서로에게 질렸는지를 보여주는 초반의 말싸움과, 기억을 잃은 뒤 달라지는 분위기의 차이가 웃음의 중심이다. 프로포즈가 낯선 두 사람의 가짜 약혼이라면, 30일은 너무 잘 아는 두 사람에게 생긴 뜻밖의 빈칸을 이용한다.
한국어 대사의 박자와 주변 인물들이 끼어드는 소동을 좋아한다면 이쪽이 더 편하게 들어올 수 있다. 대신 조용하고 섬세한 연애담을 기대하면 인물들의 말투와 상황이 꽤 과장됐다고 느낄 것이다. 연애의 설렘보다 싸우던 시절까지 웃어넘길 수 있는 코미디에 가깝다.
익숙한 연애 공식이 심심해졌다면
팜 스프링스
결혼식에서 만난 나일스와 세라는 같은 하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복되는 하루라는 설정을 알고 들어가도 영화의 매력이 줄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무엇을 해도 다음 날이 오지 않는 상황을 장난처럼 쓰지만, 두 사람이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게 보이면서 이야기에 묘한 무게가 생긴다. 농담의 결도 앞의 두 작품보다 건조하고 짓궂다.
로맨스 코미디에 장르 영화의 아이디어가 섞인 걸 좋아한다면 가장 먼저 권하고 싶다. 달콤한 데이트 장면을 오래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조금 엉뚱할 수 있다. 스포일러 경고를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반복되는 하루를 두 사람이 어떻게 보내는지 자체가 재미다. 기본 설정만 알고 재생하는 편이 좋다.
사랑을 둘러싼 가족까지 보고 싶다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레이첼은 남자친구 닉과 싱가포르에 갔다가 그가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 알게 된다. 화려한 저택과 파티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오래 남는 건 두 사람의 관계에 가족의 기대가 들어오는 방식이다. 연인이 서로 좋아하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각자의 세계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밝은 화면 안에서 묻는다.
볼거리가 풍성한 로맨스 코미디를 찾거나 연애와 가족 사이의 긴장을 다룬 이야기에 끌린다면 잘 맞는다. 반대로 두 주인공이 단둘이 보내는 시간에 집중하고 싶다면 주변 인물과 가족 이야기가 많게 느껴질 수 있다. 화려한 장면 뒤에서 레이첼이 자기 자리를 어떻게 지키는지 살피면 영화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오늘 한 편만 고른다면 대사가 듣고 싶은 날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웃을 힘이 필요한 날엔 프로포즈나 30일, 익숙한 공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날엔 팜 스프링스를 고르겠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사랑이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시기에 더 잘 들어온다. OTT 제공 여부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달라지니, 마음이 가는 작품을 고른 뒤 이용 중인 서비스에서 제목을 확인하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