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원작 드라마 추천을 부탁받고 다시 골라봤다

얼마 전 친구가 소설 원작 드라마 추천을 부탁하면서 조건을 하나 붙였다. 원작을 읽지 않아도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 1000편 넘게 영상을 보다 보니 이 조건이 꽤 중요하다는 걸 안다. 좋은 소설을 옮겼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드라마가 되지는 않는다. 아래 다섯 편은 각각 다른 기분의 날에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이야기의 출발점만 소개하고, 주요 반전과 결말은 밝히지 않는다.
가볍게 시작하고 싶다면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의 동명 소설을 옮긴 6부작 드라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젤리’를 보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학교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에 맞선다. 설정만 들으면 무서울 것 같지만, 플라스틱 칼과 장난감 총을 든 주인공의 모습에는 엉뚱한 유머가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젤리도 이 작품만의 볼거리다.
잘 맞는 사람은 설명이 촘촘한 판타지보다 낯선 세계에 먼저 뛰어들어 보는 쪽을 좋아하는 시청자다. 반대로 모든 사건의 규칙과 이유가 또렷하게 밝혀져야 편하다면 중간중간 어리둥절할 수 있다. 나는 이 드라마의 매력이 그 빈틈에도 있다고 본다. 이상한 것을 보는 사람이 누군가를 지키려고 출근한다는, 소설 특유의 다정한 발상이 화면에서도 살아 있다.
짧고 강한 성장담을 원한다면 퀸스 갬빗
월터 테비스의 소설이 원작인 7부작이다. 체스에 재능을 보이는 베스 하먼이 성장하며 경쟁과 중독, 외로움을 겪는다. 체스 규칙을 몰라도 괜찮다. 대국 장면은 말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보다 베스가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자신을 얼마나 몰아붙이는지에 집중하게 만든다.
화려한 의상과 공간 덕분에 술술 넘어가지만, 이야기의 감정은 마냥 경쾌하지 않다. 재능 있는 주인공이 연승하는 통쾌함만 기대했다면 약물 의존을 다루는 장면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대신 완결된 한 사람의 성장담을 주말 동안 보고 싶다면 좋은 선택이다. 원작을 몰라도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 원작 드라마의 좋은 입문편이기도 하다.
오래 마음에 남는 가족 이야기는 파친코
이민진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다. 선자와 그 가족의 삶을 따라가며 한국과 일본, 여러 세대를 오간다. 큰 역사적 사건을 인물들의 식탁과 일터, 가족 사이의 선택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이 좋았다. 드라마는 시간대를 오가므로 처음에는 인물 관계를 붙잡는 데 조금 집중해야 한다.
빠른 반전보다 한 선택이 다음 세대에 남기는 흔적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시대적 차별과 생존의 무게가 계속 흐르기에 편안한 가족극을 기대한다면 묵직할 수 있다. 그래도 인물들을 ‘역사의 피해자’라는 한 줄로 가두지 않는 시선이 있다. 특히 선자가 버텨 온 시간이 얼굴과 말투에 쌓여 보이는 순간들이 오래 남는다.
조용한 관계극을 좋아한다면 노멀 피플
샐리 루니의 소설을 각색한 12부작이다. 코널과 메리앤이 학교를 떠나 대학으로 가는 동안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사건을 크게 터뜨리기보다 말하지 못한 마음, 서로 다른 형편, 어색한 침묵을 따라간다. 대화가 끊긴 뒤에도 카메라가 인물 곁에 머무는 시간이 이 작품의 표정이다.
로맨스에 분명한 악역이나 시원한 오해 해소가 있어야 한다면 답답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가 어긋나는 이유를 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걸 아는 시청자라면 깊이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친밀한 장면과 정서적으로 힘든 장면이 있으니 가벼운 연애물을 찾는 날보다는 차분히 볼 수 있는 날에 맞는다.
규모 큰 수수께끼가 당긴다면 삼체
류츠신의 소설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SF 드라마다. 첫 시즌은 8부작으로,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마주한 인물들이 위협의 실체를 좇는다. 원작의 방대한 생각을 여러 인물의 이야기로 풀어내서 초반부터 따라갈 실마리가 있다. 시대와 장소가 바뀌므로 첫 두 편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보는 편이 낫다.
‘이 일이 벌어지면 인류는 어떻게 움직일까’ 같은 질문을 즐긴다면 다음 회를 누르게 된다. 다만 첫 시즌만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란다면 멈춘 느낌이 들 수 있다. 잔혹한 장면도 있어 수위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먼저 권하지 않는다. 나는 이 작품을 과학 지식을 시험하는 드라마보다, 거대한 위기 앞에서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봤을 때 더 재미있었다.
다섯 편 중 무엇부터 볼지는 원작의 유명세보다 지금 원하는 감정에 달려 있다. 기분 전환에는 보건교사 안은영, 몰입해서 끝까지 달리고 싶을 때는 퀸스 갬빗, 보고 난 뒤에도 인물의 삶을 곱씹고 싶을 때는 파친코가 떠오른다. 좋은 각색은 책을 대신하지 않는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화면이 꺼진 뒤에도 같은 인물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